에리히 프롬 / 자유로부터의 도피
근대인은 너무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며,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는 알아도
그것을 획득하지는 못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모든 정력은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쓰여진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행위의 전제,
즉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소망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그들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따려고 하며,
어른이 되어서는 더욱더 성공하여, 보다 많은 돈, 보다 많은 특권,
보다 좋은 자동차를 구해서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다니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히 광적인 행위를 멈추고 잠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 만약 이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된다면,
보다 좋은 자동차를 얻게 된다면,
이런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엔?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진정 나 자신일까?
나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예상되며,
더욱이 그것에 도달한 순간
교묘하게 나를 속이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사람들은 되도록 빨리, 이러한 귀찮은 생각에서 빠져 나가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에 피곤함과 억압을 느낌으로써 그것을 귀찮게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목표를 쫒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로서 진실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불과하다는 진실-
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이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결해야 할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것'으로 예상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는 큰 위험마저도 무릅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목표를 부여하는 위험과 책임은 몹시 두려워하여
이를 행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사를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 사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환상에 의해 개인은 스스로의 불안을 의식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환상이 도움이 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자아는 약체화되고,
그 때문에 그는 무력감과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그는 순수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두 도구화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만든 기계의 일부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순수한 안정의 기초가 되어야 할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별나게 되지 않고 남의 기대에 순응함으로써
자기의 동일성에 대한 회의는 가라앉고
일종의 안정감이 주어진다.
그러나 지불되는 대가는 비싸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력의 방해가 된다.
심리적으로 자동인형인 것은 설사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더라도
감정적, 정신적으로는 죽어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만일 자기가 바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알기만 하면,
자기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른다.
그는 익명의 권위에 협조하여 자기의 것이 아닌 자기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일을 하면 할수록 그는 무력함을 느껴서 더욱더 순응을 강요당한다.
낙천주의와 창의의 겉치레에도 불구하고, 근대인은 무력감에 압도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마치 마비된 것 처럼 다가오는 파국을 바라보고만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은 경제생활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 순조로운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이한 겉치장의 배후에 숨어 있는 뿌리깊은 불행은 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이 떠나는게 아니라,
사랑이 떠났기 때문에 사랑할수 없게 된다.
돈이 많거나 아름답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이고
가난해져서 사랑이 떠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의 감정이 떠났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이 조절할수 없는 감정이며
영원하고 싶다고 붙잡아 둘수도 없고,
잠깐 즐기다 보내고 싶다고 해서 보낼수 있는것도 아니다.
깃들면 받아들이고,
떠나면 보내는 것.
억지로 소유하려거나 붙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떠나 보내야 할 때 보내는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
에리히프롬 / 소유하지 않는 사랑, 존재하는 사랑